최근 그녀는 평면작업에 몰두한다.
인간세상이 아닌 안식처를 이야기한다. 그곳은 천국이거나 마음의 안식처이면 족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해주는 지금의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지금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일 뿐이다. 이것은 언젠가 사라질 무엇이며,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구원의 공간이다. 상황을 받아들인다.
작품을 제작하면서 어떤 때는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의 시원함과 통쾌함을, 그것을 바라보는 백성의 두려움과 떨림에 대한 해소를 표현한다.
그것이 그려지는 공간이 복도이거나 천정이거나 관여치 않는다. 그러면서 작품에는 치유의 기능이 담긴다. 믿음에 대한 치유이며, 불신에 대한 타파가 된다.
그렇다고 종교적 관점에 집중하는 것만은 아니다. 교회에 입성되는 작품과 전시장에 전시되는 작품사이의 간극은 존재한다.
이것은 운(韻)과 율(律)의 관계다. 운은 소리의 여운이며 울림이다. 율은 시각화 시켜내는 리듬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세로줄은 현재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녀에 있어 가로줄은 막힘이며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의 현실이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로줄은 십자가의 일부다.
십자가에 의해 희석되고 십자가에 의해 용해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석원은 “비 물질성을 지니면서 장소 이탈 적 성격에서 생각해볼 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녀가 표현한 바다물결, 파도가 국소적인 관점에서 ‘물’ 이란 성질을 감안할 때 고정된 형태나 물질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처럼 그것은 있어야 할 장소를 전시장 공간으로 장소를 이탈하고 변형시킨 것이다.
자연적 상태에서 바라본 자연의 모습은 풍경화 자체로 인식하는데 그 당시의 감성과 전시장으로 편입된 풍경은 동일하지만 차이가 있다.
그것은 관조적 시각과 몰입적 시각의 차이, 자연적 공간에서 느끼는 감동과 밀폐된 장소에서 제 3자인 관객이 바라보는 차이다.”고 하였다.
배경은 언제나 희망이다. 희망은 녹색이거나 숨겨진 배경에 있다. 그림을 통하여 치유를 말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것과 같다. 어둠을 이기고 아침이 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이 된다.
그 곳에 그녀가 있다. 스스로 속된 마음을 씻고,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작품에 형성된 선들은 그녀의 발목을 담고 정수리에 이르기 까지 온 몸을 젖게 한다.
거기에서 리듬을 찾고 율(律)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일관된 호흡에서 가능해 지는 일이다. 스스로 치유하는 상태에서 그려지기 때문에 관람자에게도 치유의 영역이 마련된다.
자유를 향한 갈망은 인간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이며 믿음의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