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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ng of the Light​​​​
Park. L
The song of the Lights - 빛의 노래

律율                                                                                                                                               글 박정수(평론가,정수화랑 대표)
리듬이 있다. 그것은 흐름이며 동작이다. 그것은 질서이며 안정된 휴식이다. 박엘은 리듬을 즐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리듬을 시각으로 표현해 낸다.
얇은 바람결을 그림으로 그려내듯이 내부에 존재하는 감각이 자연의 공간에 안착한다.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안정된 리듬감을 찾는다.
그림의 성질이 멈춤에서 움직임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특별한 형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을 제공받는다.
음악에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 리듬이 그림에 있다. 리듬의 속성과 함께하는 율(律,meter)의 공간이 마련된다. 율은 규칙이다.
그녀의 그림에 표현되는 율은 일정하게 반복되는 화면의 구성이며 강약과 고저가 표현되는 주기적 개념이다. 그래서 음악에 자주 쓰이는 율은 그녀 작품에서는 주요 핵심어가 된다.
율은 그녀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격(格,type)으로서 믿음의 현재적 표현이다. 규칙적인 붓의 행적을 통해 그녀 자신의 행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파동을 재현한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보고 그리는 것과 같다. 높고 낮음에 대한 기운과 어디론가 향해 있는 자신의 소망이 바람의 흐름과 같은 감각적 표현이다.
때로는 변별적 징표를 지닌 마음의 소리로 전이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미술작품의 전부가 그녀의 믿음에 귀의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는 예술의 표현방식과 믿음 사이를 오가는 음률의 규칙적 조화가 있다. 반복되는 행위의 결과를 통해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온전한 삶의 근원과 맞닿아 있음이다. 자연의 삶과 믿음의 삶이 작품에서는 보편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동양회화에서 말하는 기운(氣韻)의 운(韻)으로 이해되기도 하다. 자연과의 상생과 마음의 평화를 운률(韻律)로 해결된다.
따라서 미술작품으로 형성되는 붓질을 자유스럽지만 일정한 규칙이 있다. 서로 다른 이질감을 하나의 소망으로 연결시키는 이러한 그녀의 작품은 율(律)에 근거한 이해로 접근하여야 한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것은 조직적이지도 규칙적이지도 않다. 어쩌다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무한의 공간을 장악하면서 거대한 구조물로 전환시키는 힘이 있다.
율(律)에 의한 질서 회복이다. 이와 같은 작품 활동의 근원은 자연에서 시작된다. 자연은 하늘의 공간이며 믿음의 상징이다. 자연에 가까운 색과 자연의 호흡과 함께하는 율을 찾는다.
인위적이지만 인위성을 최대한 배제한다. 직접 색을 칠하면서 스스로 책이 찾아지는 순간을 기억한다. 공기의 흐름과 온도의 변화, 작은 바람의 숨결도 놓치지 않는다.
불순물을 걸러내고 스스로 융화되는 상태가 된다. 바다에 온 듯한 시원함과, 여름날 그늘에서 잠시 쉬는 여행자의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된다. 

최근 그녀는 평면작업에 몰두한다.
인간세상이 아닌 안식처를 이야기한다. 그곳은 천국이거나 마음의 안식처이면 족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해주는 지금의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지금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일 뿐이다. 이것은 언젠가 사라질 무엇이며,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구원의 공간이다. 상황을 받아들인다.
작품을 제작하면서 어떤 때는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의 시원함과 통쾌함을, 그것을 바라보는 백성의 두려움과 떨림에 대한 해소를 표현한다.
​그것이 그려지는 공간이 복도이거나 천정이거나 관여치 않는다. 그러면서 작품에는 치유의 기능이 담긴다. 믿음에 대한 치유이며, 불신에 대한 타파가 된다.
그렇다고 종교적 관점에 집중하는 것만은 아니다. 교회에 입성되는 작품과 전시장에 전시되는 작품사이의 간극은 존재한다.
​이것은 운(韻)과 율(律)의 관계다. 운은 소리의 여운이며 울림이다. 율은 시각화 시켜내는 리듬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세로줄은 현재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녀에 있어 가로줄은 막힘이며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의 현실이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로줄은 십자가의 일부다.
십자가에 의해 희석되고 십자가에 의해 용해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석원은 “비 물질성을 지니면서 장소 이탈 적 성격에서 생각해볼 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녀가 표현한 바다물결, 파도가 국소적인 관점에서 ‘물’ 이란 성질을 감안할 때 고정된 형태나 물질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처럼 그것은 있어야 할 장소를 전시장 공간으로 장소를 이탈하고 변형시킨 것이다.
​자연적 상태에서 바라본 자연의 모습은 풍경화 자체로 인식하는데 그 당시의 감성과 전시장으로 편입된 풍경은 동일하지만 차이가 있다.
그것은 관조적 시각과 몰입적 시각의 차이, 자연적 공간에서 느끼는 감동과 밀폐된 장소에서 제 3자인 관객이 바라보는 차이다.”고 하였다.
배경은 언제나 희망이다. 희망은 녹색이거나 숨겨진 배경에 있다. 그림을 통하여 치유를 말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것과 같다. 어둠을 이기고 아침이 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이 된다.
그 곳에 그녀가 있다. 스스로 속된 마음을 씻고,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작품에 형성된 선들은 그녀의 발목을 담고 정수리에 이르기 까지 온 몸을 젖게 한다.
거기에서 리듬을 찾고 율(律)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일관된 호흡에서 가능해 지는 일이다. 스스로 치유하는 상태에서 그려지기 때문에 관람자에게도 치유의 영역이 마련된다.
자유를 향한 갈망은 인간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이며 믿음의 빛이다.

NOUVLLE SA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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